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의 한주(寒洲) 성리설(性理說) 수용 과정과 심설(心說) 논변A Process of Accommodating Hanjou Seonri-seol and Discourse on Mind Theory of Jadong Lee Jeong-mo
- Other Titles
- A Process of Accommodating Hanjou Seonri-seol and Discourse on Mind Theory of Jadong Lee Jeong-mo
- Authors
- 전병철
- Issue Date
- 2021
- Publisher
- 한국철학사연구회
- Keywords
- 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후산(后山) 허유(許愈); 『자동집(紫東集)』; 명덕설(明德說); 심위태극설(心爲太極說); Jadong Lee Jeong-mo; Hanjou Lee Jin-sang; Husan Heo-Yu; the Jadong Collection; righteous virtue theory; Simwitaegeuk (心爲太極)
- Citation
- 한국철학논집, no.70, pp 7 - 29
- Pages
- 23
- Indexed
- KCI
- Journal Title
- 한국철학논집
- Number
- 70
- Start Page
- 7
- End Page
- 29
- URI
- https://scholarworks.gnu.ac.kr/handle/sw.gnu/5087
- DOI
- 10.35504/kph.2021..70.001
- ISSN
- 1598-5024
- Abstract
- 19세기 중기 경남 의령 출신인 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 1846-1875)는 삼십 년의 삶을 살았다. 그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한주학파(寒洲學派)에서 주문팔현(洲門八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스승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한 기록이나 동문들이 그를 추억한 내용을 통해 이정모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공자(孔子) 문하의 안회(顔回)처럼 뛰어난 덕행으로 인해 스승과 동문의 존중을 받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이정모의 심설(心說)을 이해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그런데 그가 한주의 문하에 나아간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별세했다. 그러므로 『자동집』에 남아 있는 저술들은 그가 정립한 원숙한 수준의 학설이기보다, 모색하는 과정에서 고민하고 탐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게다가 문집의 내용에서 심설에 관한 자료가 매우 적다. 이와 같은 자료적 한계를 전제한 가운데, ‘명덕설(明德說)’과 ‘심위태극설(心爲太極說)’의 두 명제를 통해 이정모의 심설에 대해 가늠할 수 있는 윤곽을 파악하려 했다.
이정모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의 관점에 근거하여 명덕을 심(心)으로 파악했으며, 이것은 『대학장구』의 주자(朱子) 주석에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중리(衆理)를 갖추고서 만사(萬事)에 응대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라고 해석한 것에 근거했다. 이런 관점에 근거해 정재규(鄭載圭)와 허유(許愈)가 주리(主理)의 관점에서 명덕을 심(心)으로 보지 않고 이(理)로 해석하는 설을 논박했다.
이정모는 1872년 여름에 허유와 곽종석(郭鍾錫)을 따라 성주로 가서 처음으로 한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한주의 성리설을 즉각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1873년에 심위태극(心爲太極)의 해석에 관해 허유와 논변하고 한주에게 질의한 내용을 살펴본다면, 그는 이때까지도 심즉리설(心卽理說)이 아니라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의 관점을 독실하게 믿었다. 그런데 한주의 권유에 의해 곽종석의 저작인 『지의록(贄疑錄)』을 읽고 난 후, 그는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대한 의구심이 풀리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874년 겨울에 계모 안씨(安氏)의 상을 당해 삼년상을 지내던 중에 병을 얻어 이듬해에 별세했다.
이처럼 이정모가 한주 성리설을 수용한 계기까지는 확인이 가능하지만, 그 이후의 계승과 발전을 논할 수 없는 점이 무척 아쉽다. 그런데도 이정모가 ‘한주팔현(寒洲八賢)’에 꼽히는 까닭은 그가 서른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이룩한 학문과 덕성이 오랫동안 동문과 후세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학문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던 사실을 허유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정모가 서른의 나이에 별세했지만, 허유는 그의 죽음을 요절이 아니라 군자의 올바른 마침[考終]이었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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