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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몽항쟁기 分司南海大藏都監의 운영체계와 설치 배경Namhae Division of the Grand Sutra Publication office(Bunsa Namhae Dae'jang Do'gam, 分司南海大藏都監), Why it was installed, and how it was operated during Goryeo's defense against the Mongolians

Other Titles
Namhae Division of the Grand Sutra Publication office(Bunsa Namhae Dae'jang Do'gam, 分司南海大藏都監), Why it was installed, and how it was operated during Goryeo's defense against the Mongolians
Authors
윤경진
Issue Date
2014
Publisher
역사실학회
Keywords
the Grand Sutra publication(大藏都監); the Division of the Grand Sutra Publication office(分司大藏都監); Namhae(南海); Jinju-mok(晉州牧); Establishing new defense posts on distant islands(海島入保); Jeong An(鄭晏); Gye’su-gwan(界首官); 大藏都監; 分司大藏都監; 南海; 晉州牧; 海島入保; 鄭晏; 界首官
Citation
역사와 실학, no.53, pp.5 - 49
Indexed
KCI
OTHER
Journal Title
역사와 실학
Number
53
Start Page
5
End Page
49
URI
https://scholarworks.bwise.kr/gnu/handle/sw.gnu/19946
ISSN
1976-1023
Abstract
이 글은 고려 대몽항쟁기 南海에 설치된 分司大藏都監의 운영체계와 설치 배경을 界首官을 매개로 한 지방출판체계와 당시 항쟁 전략으로 채용된 海島 入保와의 연관성을 통해 고찰하였다. 이는 分司南海大藏都監의 설치와 운영을 보편적 제도와 구조의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해석과 내용 확인을 도모한 것이다. 이를 통해 얻어진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적의 판목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사업이 이루어졌다. 중앙에서는 秘書省이 이를 담당했으며, 지방의 界首官이나 그에 준하는 대읍에서 판목을 제작해 올려보냈다. 서적 간행을 개인이 발원하더라도 국왕에게 재가를 받았으며, 국왕은 이를 계수관으로 보내 印刊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판목 제작과 다량 인쇄의 비용이 커서 국가적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李奎報의 문집에는 서적 간행과 관련된 다수의 序跋이 실려 있다. 崔宗峻이 주도한『御醫撮要』와 崔址가 주도한『東坡文集』이 국왕의 재가를 거쳐 각각 西京과 全州에서 印刊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때로는 국왕의 재가가 보이지 않고 按察使가 주도한 것으로 나오는 사례도 보이지만, 이는 이규보가 지방에 재임할 때 글을 지은 결과로, 역시 국왕에게 요청하여 재가를 받는 과정이 있었다. 안찰사 盧軾의 주도로 全州에서『十二國史』를 인간한 것이 그 예이다. 노식은 안찰사 부임을 계기로 국왕에게 책의 인간을 요청하였고, 부임과 더불어 책의 간행을 주도하였다. 南海의 분사도감은 소속 계수관인 晉州牧 관원이 겸임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고종 38년 이규보의 손자 李益培가 분사도감을 통해 간행한 『東國李相國集』의 발문에는 간행 경위와 더불어 당시 사업에 참여한 분사도감의 직제가 나와 있다. 진주목의 副使가 도감의 副使를 겸임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실무진으로 錄事를 두었다. 이 책 또한 대장경과 마찬가지로 왕명에 의해 조판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분사도감의 운영이 진주목의 관할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고종 35년에 간행된『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의 말미에는 按察使 全光宰가 大藏分司를 兼任하며 책을 조판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안찰사는 진주목부사보다 하위직으로서 그가 분사도감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없다. 통상적인 안찰사 업무와 더불어 분사도감에 대한 감찰과 같은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전광재는 3년 뒤 晉州牧副使로서 분사도감의 부사를 겸임하고 있어 안찰사가 분사도감의 책임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전광재는 幹事比丘를 통해 책의 교감자를 구했는데, 이는 교감이 분사도감의 업무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繕寫를 통한 板下本 제작도 대장도감에서 처리되고 분사도감은 판각 과정만을 수행하였다. 한편『禪門拈頌說話』에 수록된 鄭晏의 발문에는 고종 30년 斷俗寺 주지로 있던 萬宗(崔沆)이 海藏分司, 곧 분사도감에 예물을 보내 책을 간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인접한 진주목이 아니라 분사도감에서 책을 간행하게 한 것은 진주목이 가지고 있던 출판 기능이 분사도감으로 이전된 결과이다. 만종이 예물을 보낸 것은 사적으로 책을 간행한 데 따른 비용을 지불한 것이며, 전광재의 경우에는 공적 체계에 의존해 책을 간행한 차이가 있다. 분사도감의 남해 설치는 이곳에 퇴거하고 있던 鄭晏의 발원과 사재 희사에서 그 계기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공적으로 운영되는 대장경 조판에서 분사 설치가 개인의 발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남해의 분사도감 설치를 계기로 정안의 발원과 희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장도감 설치와 대장경 조판은 최우의 주도로 시작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국왕과 群臣이 함께 참여하는 국가적 사업이었으며, 분사도감 설치 또한 그 연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록에서 최우와 정안의 역할이 부각된 것은 공적 사안을 사적인 측면에서 부각시키는 열전 기록의 특성과도 관련된다. 분사도감의 운영을 진주목 관원이 담당함에도 분사도감을 남해에 설치한 것은 남해도가 가지는 지정학적 조건에 따른 것으로, 이는 海島 入保와 관련된다. 당시 남도에서는 계수관을 단위로 주력군 일부가 해도에 들어가 군사력을 보존하고 유사시에 출륙하여 몽고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입보 과정은 夜別抄가 주도했으며, 이로 인해 뒤에 주요 입보 도서가 三別抄 항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항쟁 거점이 된 珍島에는 羅州牧이 입보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역시 삼별초의 근거지가 된 남해도는 진주목의 입보가 유추된다. 결국, 분사도감의 남해 설치와 진주목 관원의 분사도감 겸직은 진주목의 남해도 입보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분사도감 설치 자체가 해도 입보의 속성을 가지며, 대장경 조판의 안전을 도모하는 의미가 컸다. 같은 시기 이웃한 彰善島에 國史가 봉안되었던 것도 안전한 보관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강화도의 여건이 악화되면 대장도감이 남해도로 이동했을 것이지만, 조판 기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분사도감의 분담율은 1/10에 그치게 되었다. 한편, 기존에 남해도의 분사도감 설치와 관련해 두 가지 논란이 있다. 하나는 남해도 외에 여러 곳에 분사도감이 설치되었다는 입론이다. 이 견해는 분사도감 운영에 안찰사 및 계수관이 관여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하며, 실제 사례로 晉州나 東京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최우와 정안의 발원에서 각기 ‘반’씩 담당했다는 설명은 대장경 조판이 강화와 남해 두 곳에서만 진행되었음을 뒷받침한다. 또한 대장경 경판의 刊記는 大藏都監과 分司大藏都監으로 대별되는데, 남해 이외의 분사도감이 있었다면 판각 책임 소재가 달라지므로『宗鏡錄』에 보이는 ‘分司南海大藏都監’처럼 지역을 구분했을 것이다. 분사도감이 한 곳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지역을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해의 분사도감 설치는 지정학적 특징을 활용한 것인 만큼 내륙의 또다른 제작처를 설정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경판이 남해에서 제작되었다는 입론이다. 이 견해는 같은 경전이 같은 시기에 大藏都監과 分司都監에서 나누어 조판하였고, 刻匠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례가 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경판을 한 곳에서 제작했다면 도감을 나누어 둘 이유가 없고, 간기에서 제작처를 구분할 이유도 없다. 또한 분사는 동일한 조직과 기능을 가진 관부를 따로 두는 것으로, 유사시에 별도의 장소에서 해당 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분사는 본사와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운영 원리는 西京 分司에서 잘 나타난다. 서경 분사는 국왕이 巡駐했을 때 정치 운영이 가능하도록 중앙의 주요 관부와 같은 조직을 마련해 둔 것이다. 分司의 본령은 작업의 분담보다 유사시에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데 있다. 아울러 경전과 제작처, 그리고 각장의 연관성은 순환 근무의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 분사도감에서 직접 인력을 관리하기 어려운 만큼 강화에서 각장을 보내 일정 기간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특정 경전을 판각하는 도중에 파견되어 해당 작업을 지속할 경우 같은 각장이 두 도감의 경판에 모두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근무 형태는 서경 분사에서도 확인된다. 강화의 대장도감에서 일차적으로 재원과 인력을 관리하며 일부를 분사도감으로 보내 사업 진행을 보조하였던 것인데, 정안의 희사가 부각되는 것은 이러한 부담을 현지에서 일정 부분 보완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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