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년 「答薛仁貴書」의 ‘平壤已南 百濟土地’에 대한 재해석 : 백제의 영토의식과 浿河의 새로운 이해Reevaluating the Line “South of Pyeong’yang, Baekje Territory(平壤已南 百濟土地)” in the 671’s 「Letter of Response to Seol In-gwi(答薛仁貴書)」: Examination of the Baekje people’s View of their own Territory and the Pae River(浿河)
- Other Titles
- Reevaluating the Line “South of Pyeong’yang, Baekje Territory(平壤已南 百濟土地)” in the 671’s 「Letter of Response to Seol In-gwi(答薛仁貴書)」: Examination of the Baekje people’s View of their own Territory and the Pae River(浿河)
- Authors
- 윤경진
- Issue Date
- 2016
- Publisher
-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역사문화연구소
- Keywords
- South of Pyeong’yang; Baekje territory(平壤已南 百濟土地); Letter of Response to Seol In-gwi(答薛仁貴書); Pyeong’yang (平壤); Biyeol-seong(卑列城); Pae river(浿河[浿江]); Geunchgo- wang(近肖古王); Gyeon Hweon(甄萱); 平壤已南 百濟土地; 答薛仁貴書; 卑列城; 平壤; 浿河(浿江); 近肖古王; 甄萱
- Citation
- 역사문화연구, no.60, pp 3 - 54
- Pages
- 52
- Indexed
- KCI
- Journal Title
- 역사문화연구
- Number
- 60
- Start Page
- 3
- End Page
- 54
- URI
- https://scholarworks.gnu.ac.kr/handle/sw.gnu/16131
- DOI
- 10.18347/hufshis.2016.60.3
- ISSN
- 1598-6454
2733-4201
- Abstract
- 이 논문은 671년 「答薛仁貴書」에 보이는 ‘平壤已南 百濟土地’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 준거로서 백제 영토의식의 내용을 살펴본 것이다. 그동안 이 구문에 대해 신라의 ‘통일’을 긍정하는 견해에서는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토지”로 해석하였다. 반면 ‘통일’을 부정하는 견해에서는 “평양이남 중에서 백제의 토지”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구문은 신라가 백제 고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제기한 것으로, “평양 이남이 백제 토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것을 신라에게 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여 대상이 되는 ‘영역’에 대해 공간 구분에 따라 설정되는 ‘범위’와 국가적 귀속에 따라 규정되는 ‘속성’이라는 두 층위에서 규정한 것이다.
당이 신라에 주기로 한 땅이 백제 토지에 국한된다는 것은 같은 글에 보이는 卑列城(比列忽)의 귀속 문제에서도 확인된다. 신라는 고구려 공멸을 틈타 비열성을 차지했으나 당은 이곳이 고구려 토지라는 이유로 고구려로 환속시켰다. 이에 신라는 본래 자신의 땅이었음을 내세워 신라 귀속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로 귀속되는 지역에 대해 신라는 영유권이 없다는 원칙을 드러낸 것이다.
신라가 ‘평양이남’을 ‘백제토지’로 간주하는 것은 백제의 영토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영토를 확장하며 평양까지 공격한 바 있는데, 이것이 영토의식의 근간이 되었다. 온조왕의 강역 획정 기사는 이 때의 인식을 투영한 것으로 그 북경은 패하(패강)로 제시되어 있다. 이 패하는 바로 대동강을 가리킨다.
그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 기사에 보이는 패하는 예성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예성강의 상류인 猪灘에 대해 “浿江으로도 불렀다”고 주기한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조선초기에 저탄을 패강으로도 불렀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며, 그것도 예성강 상류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을 공인 받은 기사의 패강은 대동강이다. 또한 927년 후백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글에서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의 물로 말을 먹인다”라고 한 구문의 패강 또한 대동강이다. 견훤이 이곳의 수복을 천명한 것은 백제의 영토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이 고려에 들어와 예성강의 상류인 저탄을 가리키는 말로 바뀐 것이다. 또한 『명태조실록』에는 예성강과 함께 패수가 열거되고 있어 대동강을 패수로 보는 인식이 고려말까지 유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영토의식의 준거로서 패하의 의미를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가 ‘浿帶之間’이다. 백제의 건국설화 중 沸流를 중심으로 한 기사에는 그가 浿水와 帶水를 건너 彌鄒忽에 도읍을 정하는 내용이 보이며, 온조왕 때 漢水 이북의 기근으로 패대지간이 텅 비게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패수는 고구려로부터의 이탈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대동강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대수는 미추홀로 진입하는 조강으로 파악되며, 패대지간이 한수 동북과 같은 의미라는 점에서 사실상 한강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결국 ‘평양이남 백제토지’는 대동강 이남이 온전히 백제의 땅이라는 의미이며, 이에 입각할 경우 7세기 신라의 전쟁은 삼국의 ‘통일’이 아니라 백제 병합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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